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고 둥근 돌을 어루만지며 흘러가는 개울물이 자꾸 생각난다. 그치지 않고 유연하게 흘러가는 몸짓이며 그 소곤소곤 속삭이는 듯한 시어들이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 쏴-하니 흘러드는 것만 같다. 그 흐름의 속사정은 또 어떠한가. 모나고 삐뚤어진 돌뿌리들을 끊임없이 쓰다듬는 시인의 마음은 아픔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까칠한 모래와 단단한 돌바닥을 가슴으로 쓸고 지나가는 개울물처럼 삶은 고통을 견뎌내며 조금씩 늙어가는 것, 이 물의 흐름이 그치는 날까지 시인은 겸허한 기다림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

나희덕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는 1997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시집이며, 이듬해에 시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선사하기도 했다. 근래 최고 인기 시인들의 대열에 합류한 그의 명성에 걸맞게 올해 <문학동네>에서 이 시집이 고급양장본으로 새롭게 선보이게 됐다. 그의 시집은 외형적으로는 여성시인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잘 녹아있으며, 여기에 내형적으로는 삶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깊은 고민과 가슴 아픈 시선이 든든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그의 시어들은 정말 탄탄하다. 흠잡을 데가 없다. 물 흐르는 듯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잘 지은 건축물을 들여다보듯이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세련되어 있다. "뜨거운 돌을 손에 쥐고서 글을 쓰듯이 혹은 고치가 입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시인은 세상을 향해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가슴 아픈 긴 편지를 쓴다." 이번 여름,그 편지를 함께 읽어봄이 어떠하겠는가. 나희덕의 시집 중에서 생각컨대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나희덕, <천장호에서> 전문

웅덩이를 지나다
그만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발을 헛딛는 순간
갇힌 물에서 날갯소리 들려왔다

내리는 비에
웅덩이는 깊어져가고
푸석거리는 몸이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눅눅함도 축복인 양 걸어다녔다

해가 나자
비를 머금은 잎들 반짝거렸다 그 속으로
바지의 얼룩을 끌고 가면서
마를수록 선명해지는 상처 하나 끌고 가면서
다시 푸석거리는 소리

구석에 앉아 마른 얼룩을 부비면
흙먼지였던 당신
그제야 내게서 날아올랐다
기억은 웅덩이처럼 작아져갔다
             ─ 나희덕, <웅덩이> 전문

형광등이 꺼지고
백열등 하나가 앉은뱅이책상 위에 켜지면
아버지는 비로소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곤 했던 것이
여름밤 식구들의 좁은 잠자리 때문이었는지
십오촉 백열등 빛이 너무 밝아서였는지
천정을 가득 채우던 아버지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
그 모든 것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리방 긁는 소리가 밤새 들리던 밤
목에 둘렀던 수건을 감아 뜨거운 전구알을 갈던 모습이며
쥐가 난 다리를 뻗어서 두드리던 모습이며
전구 위에 씌웠던 종이갓이 검게 타들어가던 모습이며
자줏빛으로 죽어가던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지르던 모습이며
내가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넣던 아버지,
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
세상을 행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후로도 오랜 뒤였다

오늘 밤.
내 마음의 형광등 모두 꺼지고 식구들도 잠들고
백열등 하나 오롯하게 빛나는 밤
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
내 속의 아버지가 나 내신 글을 쓰는 밤
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
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다

그때의 바람이 이 견디기 어려운 여름 속으로
백열등이 너무 어둡게도 너무 밝게도 생각되는 내 눈 속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림자 어른거리는 천정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긴 편지를 나 역시도 쓰게되는 것이다
             ─ 나희덕, <누에의 방> 전문

대동여지도는 아니더라도
네 마음의 지도 한 장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격랑의 높이를
등고선 몇 개로 대신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
수없이 밟았지만, 끝내 밟을 수 없던 그 땅의 이름들과
오래 울음 우는 네 여울목과
잎새 뒤 은밀하게 익어가는 사과 한 알의 과수원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둥근 늪지와
마음의 갈피마다 숨겨져 있는 몇 개의 길을

혹은 네 마음의 기상도 한 장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어디서 낮게 불어오는지
네 슬픔과 기쁨은 어느 골짜기에서 만나는지
순한 양떼구름 몰고 어느 황혼을 찾아가는지
네 눈동자에 드리운 장마전선 언제나 걷히려는지
아마도 나는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끌로 새겨넣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
그 속에서 자주 길 잃어버리는 일
내가 그린 그림 밖으로 걸어나갈 수 없다는 일
             ─ 나희덕, <대동여지도는 아니더라도> 전문
by zenca | 2004/06/29 14:58 | ■ 리뷰-시집 ■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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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혜광 at 2004/06/29 17:39
나히덕님이 말한 그곳이 어디일까요?
Commented by zenca at 2004/06/29 18:19
Σ혜광님..시 전문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하네요. 시에서 직접적으로 그곳이 가리키는 곳은 "사람 속 / 새 속"이 되겠네요. 이곳은 숨을 거두는 장소 곧 죽음의 장소와도 밀접하겠고요...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자기네들끼리의 거대한 비밀의 장소에 가서 죽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람이나 새들 곧 짐승들도 죽음은(죽임이 아닌 자연사는) 곧 동족의 손에 묻혀가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 숨을 거둘 때는 /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때는 /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전문
Commented by 반짝반짝수정 at 2004/06/29 22:03
크흣~~~요번에 셤에 나왔던 그분!!ㅋㅋ
Commented by ★나의예쁜뿔★ at 2004/06/29 22:24
님.. 정말 시를 좋아하시는것 같아요..^^
난 바쁘다는 핑계로 책도 잘 못읽는데..
하긴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죠
Commented by zenca at 2004/06/30 01:07
Σ반짝반짝수정님..그렇네요^^ 나희덕 시인.. 한번은 꼭 소개하고 싶었거든요..
Σ나의예쁜뿔님..시간날 때마다 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시는 그냥 맘이 편해서요^^
Commented by 은사자 at 2004/06/30 03:19
정말 좋아하는 시인이예요. 저 시집에 수록되어 있었던 건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부패의 힘> 이라는 시 제가 외우는 몇 안되는 시 중에 하나거든요. 저 안에 들어 있나요?
Commented by kattyqueen at 2004/06/30 03:31
<천장호에서>...두꺼운 얼음 아래로는 신비하게도 항상 섭씨 4도를 유지하여 생명을 품고있는 물이 흐르고 있다죠. 애타게 부르는 이의 마음을 튕겨내는 이름 밑으로는 얼마나 많은 감성과 기억과 관계가 살아있을지...에혀
Commented by 샤콘느 at 2004/06/30 11:36
첨 와보는 곳인것 같은데...
방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늦었죠?? ^^;;
저도 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어렸을 땐 시인을 꿈꾸기도 하고 말이죠...훗~
근데 핑계이긴 하지만 나이가 드니 점점 시집하고 거리가 멀어지더라구요...
좋은 시 많이 알려주세요~~
Commented by zenca at 2004/06/30 12:59
Σ은사자님..<부패의 힘>도 수록되어 있습니다.좋은 시들이 많아서 미처 여기에 소개를 못했네요...저도 나희덕 시인의 시들이 너무 좋습니다.^^ 언제 이렇게 한번 써보나~~~ㅋ
Σkattyqueen님..그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호수가 얼어도 그 밑에 있는 물고기들이 얼어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그런데 그 얼음 밑의 마음과 기억까지는 저도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대단한 감수성을 가지신 듯...^^
Σ샤콘느님..안녕하세요. 이글루에 있던 샤콘느님의 사진들 정말 좋던데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하구요. 가끔은 시집도 읽고 그러세요. 시에서 영감을 얻고 사진을 찍으면 더 좋을 듯... 신현림 시인이 사진도 찍고 그러거든요~^^
Commented by 토토 at 2004/06/30 17:48
늘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ㅣ ^--^
시집을 자주 읽지 않는 토토는 어떤 시인의 글이 좋은지 잘 모르는데.. 늘 이렇게 와서 보구가면서 감사할따름~
Commented by 미첼 at 2004/06/30 20:19
내일 서울 올라가면서 책한권 사서 보려 하는데 괜찮은 소설 하나 추천해주세요. 기차타고 부산에서 서울 올라가면 굉장히 지루하거든요 -_-;; 내용이 따분해지기 쉬운 것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는 거라면 더 좋고요 =ㅅ=
Commented by 토리 at 2004/06/30 21:50
저는 시를 읽어도 잘 감동을 못하는 감수치(?)예요. 그냥 멋진 글귀군..이러고 말죠 --a 음..멋진글귀라고 생각하기까지도 오래 걸렸답니다^^ 아마 10년후쯤엔 어쩜 감동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Commented by zenca at 2004/07/01 02:26
Σ토토님..제가 오히려 감사하네요. 자주 들려주시고...^^ 시집은 마음 내키는대로 펼쳐서 한 두편정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별로 부담도 안되구요.
Σ미첼님..드디어 외출이시구나^^ 조심히 다녀와요..! 오늘 파울로 코엘료작품 올려놨는데...또는 이순원의 <19세>도 읽어볼만 해요. 제가 옛날에 이 작품이랑 <호밀밭의 파수꾼>이랑 서로 비교한 글을 쓴 적이 있었거든요.^^ 둘다 성장기의 자서전적인 체험을 다뤘거든요~~
Σ토리님의..멋진 그림에 항상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를 읽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옮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 같은데...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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